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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2019)

페르소나:

배우 이지은과 네 명의 감독들

 

 

 

 

'러브세트'가 아쉽다. 감독에 대한 기대가 컸기 때문일까. 섹스에 대한 메타포가 과도하게 노골적이라 재미없게 느껴질 정도였다. 단편의 주된 내용은 여성이 여성을 욕망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유의 아빠’인 남성(솔직히 아빠라고 부르지만 아빠 같지 않음)이 두 여자의 공통된 욕망의 대상처럼 보인다. 둘은 이 남자 때문에 경쟁을 시작하는 것처럼 연출되지만 실제로 뒤에 전개될 내용은 그렇지 않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이 남자를 코트 밖으로 밀어낸 다음부터 시작되는데 여기서부터 아주 노골적인 상징들이 난무한다.

 

 

에로틱한 함의를 가득 머금은 장면들은 서로가 서로를 그런 식으로 보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앞부분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린 섹슈얼 텐션 때문에 후반부의 ‘결혼 안 하면 안 돼요?’라는 물음도 중의적인 의미를 갖는다. 내기의 결과에 대한 투정보다는 진심이 담긴 부탁으로 들리는 것이다. 그러니 ‘하기로 했잖아.’라는 말에 ‘아니, 그게 아니라...’로 답할 수밖에. 그 이후 두나는 아이유에게 공을 건네주는데 그 태도는 일전에 남자를 코트 밖으로 밀어내며 물병을 건네줄 때와 확실히 대비된다. 그리고 두나의 뒤에 반사되는 렌즈 플레어, 의도된 부분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 무지개가 의도된 것이라면 이것은 ‘딴 소리 하지 마라 이놈들아.’하며 도장을 쾅 박은 것이나 다름 없다. 아이유의 의미심장한 표정과 함께 게임은 다시 이어진다. 이 표정이 어떤 표정인지 명확하지 않게 연출되었으나 안도감과 분노가 섞인 표정으로 보였다. 화가 나 우는 아이를 겨우 달래 놓았을 때 제 분에 못이겨 씩씩거리다 숨을 몰아 쉬며 진정하는 얼굴.

테니스 게임을 매개로 두나와 아이유의 섹슈얼한 관계를 암시하는 것. 물론 영화 내내 이어진 관음적인 시선의 주체가 여성이기에 재미있는 지점이 생겨난다. 전통적으로 항상 여성을 욕망하는 주체였던 남성은 코트 밖으로 밀려나 멍청한 얼굴로 공만 쳐다보고, 여성은 주된 플레이어로서 게임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다음이 부족하다는 것이 아쉽다. 감독이 이경미라서 더 아쉽기도 하다. 다른 이야기지만 아직도 제작발표회 현장에서 이 단편을 소개해 달라는 말에 윤종신이 지었던 당혹스러운 표정이 잊혀지지 않음(너무 웃겨서)

 

 

다음은 ‘썩지 않게 아주 오래’ 연명해온 이야기다. 남자들은 스스로 남자라는 점을 필요 이상으로 사랑해서 가끔 문제다. 그러다보니 ‘이지은’이라는 새로운 배우를 주제로 신선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더할 나위 없는 순간에 남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해묵은 이야기를 주섬주섬 꺼내는 것이다. 특별할 것 없는 서사다. 여태까지 수없이 개봉했고 아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상영되고 있을 ‘어리석은 남성상에 대한 자조 영화’ 중 하나다. 평소에는 '이성적인’ 남자들을 도저히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만들고 잔뜩 망쳐놓는 팜므파탈 여자A가 배우 이지은이라는 점이 그간의 영화와 그나마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이런 이야기를 남성 감독이 할 때는 한계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남자의 어리석음을 자조하며 메타적 서사를 외쳐도 결국 이 영화는 남성의 시각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평면적이다. ‘남자들이 참 이렇게 어리석답니다!’ 하며 아무리 스스로 꿀밤을 먹여도 꿀밤은 꿀밤이지 철퇴가 아니지 않나. 그러니 차라리 자조를 하지말라고 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배우 ‘이지은’이라는 새로운 얼굴과 함께하는 프로젝트 ‘페르소나’에 사람들이 기대한 것은 신선함일 것이다. 내가 감독이라면 아이유가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겠다. 알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여자에게 홀려서 파혼까지 한 남자의 이제 그만 알고 싶은 속마음을 담기보다는.

 

 

그런 점에서 ‘키스가 죄’는 새롭다. 한나라는 캐릭터가 가진 힘이 대단하다. 한나는 사랑을 줄 수 있는 캐릭터다. 혜복에게 투박한 사랑을 주는 주체로서 배우 이지은은 여태 맡았던 롤과는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제까지 이지은이라는 배우가 맡은 롤 중에서 배우와의 합이 가장 좋았던 캐릭터는 보통 영리하고 현실적이다. 사람들은 배우 이지은이 어린아이 같은 얼굴로 냉소적인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때 환호한다. 이는 아이유라는 연예인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과도 어느정도 맞닿아 있다. 그의 곡인 ‘스물셋’ 가사로부터 시작된 ‘곰인지 여우인지 모를’ 묘한 이미지가 이같은 카타르시스를 만들어 내는 데 한 몫을 한다.

한나는 혜복의 아버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분투하는데 말 그대로 최선을 다한다. 물론 최선을 다함이 언제나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서 그의 복수 계획은 번번히 실패로 돌아간다. 심지어 산불이라는 어마어마한 실수까지 하게 되는데 혜복의 아버지의 직업이 산불 경비인 탓에 어쩌다 복수에 성공을 하게 되는 이야기다. 물론 두 인물은 본인들이 복수에 성공한 줄도 모르고 ‘어디서 맛있는 냄새 나지 않냐?’, ‘그러게.’ 하는 말을 주고 받으며 바다나 보러 가지만.

 

전고운 감독이 그려낸 여고생의 이미지가 좋다. 전고운 감독이 제작 발표회에서 이야기했듯 미디어에서의 여고생은 보통 단정하게 교복을 차려입은 이미지로 소비되는데, 사실 실제는 그렇지 않다. 여고생이란 그런 정형화된 판타지적 이미지로 한 번에 묶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여고생의 머릿수만큼 다채롭고 에너지 넘치는 존재다.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교복을 벗어던지고 체육복을 입는 여고생은 그 활동적인 옷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고 거칠다. 그런 야생적인 모습이 한나라는 캐릭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상한 비닐 봉지와 장비를 가방에 주렁주렁 매달고 혜복을 구하러 가는 한나. 족발 한 팩을 비상식량 삼아 챙겨 다리째 들고 뜯어먹는 한나. 물론 족발 한 팩을 들고 다니며 배고플 때 꺼내 게걸스럽게 뜯어 먹을 여고생은 현실에 없을 수도 있다. 다만 정말 그럴 수도 있는 것이 현실의 여고생이지 않나. 그러니 불을 끄느라 가진 에너지를 다 써버리고도 갑자기 바다로 떠날 수 있는 힘과 회복력은 여고생에게 당연한 것이다. 이 에너지는 단편 하나를 신선하게 만들고, 한나라는 캐릭터의 개성을 살리기에 충분하다.

현실과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자연스러운 대사도 좋았다. 그런 식의 대사 톤이 가능했던 이유는 제작 발표회에서 밝힌 전고운 감독의 스타일로 유추가 가능하다. 또 혜복 역의 심달기 배우와 이지은 배우의 시너지가 좋았다. 어디까지가 정해져 있는 대사이고 어디서부터 애드리브인지 모를 정도로 대화를 주고 받는 것이 자연스러워 생겨난 생동감이 매력적이다. ‘페르소나’의 기획 의도와 가장 잘 맞아떨어지는 단편이 아니었나 싶다.

 

‘밤을 걷다’ 역시 좋다. 특별히 연출이 좋았다. 꿈에서 깨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할 연인의 꿈에 찾아온 여자의 이야기. 꿈 속이기 때문에 가능한 극적인 연출이 만드는 분위기에 취해 조용히 내용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극이 끝난다. ‘입에 잘 붙지 않는’ 대사의 연속인데 그런 점이 이 단편의 매력으로 작용한다. 소설 책을 읽어주는 것처럼 한 글자씩 곱씹어서 뱉는 서정적인 대사들은 극의 분위기를 끌어올린다. 보통 그런 대사들은 대화 사이에서 혼자 튀어 어색한 여운을 남기기 십상인데 ‘가수 아이유’로서의 장점이 십분 발휘되어 오히려 듣기 편했다. 매력적인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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