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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xt 3

항거(2019)

항거의 포스터를 좋아한다. 군중 속의 유관순. 많은 사람들 중 유관순. 포스터 프레임 너머 유관순은 마치 밖의 사람들에게 '그렇지 않냐?' 묻는 것 같다. 그렇지 않나요? 누구나 억압받는 것을 싫어하지 않나요?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유관순 열사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보통 숙연해지는데, 그가 감옥에서 겪어야 했던 고문은 2019년을 살고 있는 한국 시민으로서는 상상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기에 그렇다. 열사의 자리에 스스로를 대입해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렇게까지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를 수밖에 없고, 결국 위인의 초인적인 정신력에 경의를 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항거'에서는 그가 겪어야 했던 고문들을 적나라하게 나열하며(물론 보여줄 필요도 없고 그런 장면을 다시 보여주는 것은 과도하다.) 그가 얼마나 대단한 정신력과 의지를 갖춘 초인이었는지 상기시키지 않는다. 일반인과 다른 특별한 영웅으로서의 유관순보다는 자유를 찾고자 하는 개인 유관순에 방점이 찍혀 있다. '항거'는 영웅의 이야기를 할 때 부각하는 것을 살짝 밀어둔다. '항거'가 일반적인 영웅 서사를 따랐다면 주목할만한 내용을 뒤로 감춘다. '항거'는 영웅의 이야기를 한국적으로 그려내지 않았다. 이 점이 새롭다.

 

 

오히려 영화는 3.1 운동 이후의 이야기에 관심이 있다. '3.1 운동'이라는 극적인 장면(심지어 역사적으로 사실이다!)을 밀어두고, 영광이 끝난 뒤 무거운 형벌만이 남은 자리에 주목한다. 첫 장면부터 마지막 장면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내용과 흐름은 마치 거대한 폭발이 끝난 뒤 조용히 연소하는 잿더미처럼 느껴진다. 만세 한 번으로 모든 비극이 끝나고 행복이 찾아온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8번 방 열사들의 이야기는 '3.1 운동'이라는 한 점의 이벤트에서 극적으로 폭발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만세 이후까지 이어지는 사건이다. 영화는 선고를 받고 교도소에 도착한 유관순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영화 도입부터 무표정(약간의 짜증과 경멸이 담긴 표정)을 유지했던 유관순(배우 고아성)은 8번 방 문이 열리는 순간 경악하는데 그것은 8번 방이 억압이 중첩된 공간으로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미 감옥이라는 점에서 억압이 한 번, 몸을 움직이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좁은 방이라는 점에서 다시 한 번. 그 안에서 사람들은 빙글빙글 돈다. 유관순은 감옥 안의 움직임에 자연스럽게 섞여 든다. 그것을 동력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방 안의 열사들은 교대로 빙글빙글 돌며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그러다 어느 날 외친다. '우리는 개구리가 아니다!' 이 장면은 용암이 끓을 때 안쪽으로부터 툭툭 불거져 나오는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큰 불이 꺼진 자리에 불씨를 안고 숨죽인 잿더미처럼.

 

 

8번방 열사들의 동력은 기존과 다르다. 언니의 잘려나간 팔만 보면 힘이 난다는 이옥이(배우 정하담)의 말처럼 8번 방 열사들의 동력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영웅적 대의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개인적인 트리거에 가깝다. 김향화(배우 김새벽)는 유관순에게 기생이었던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만세를 부른 이유를 전한다. 이옥이와 김향화를 비롯한 이들이 만세를 부른 이유는 무엇인가? 바닥에 떨어진 언니의 팔이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은 태극기지만 옥이가 태극기를 보고 만세를 부른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구나 억압 받고 자유를 박탈당하는 것을 싫어하기에 인간은 무너진 일상을 돌려놓고자 분투할 수밖에 없다.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나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고귀하게 사는 법이다. 인간은 그렇다고. 인간은 자유를 위해 항거할 수밖에 없다고. 이는 영웅적 대의에 준하는 개인의 거대한 동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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