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건 내 생각인데 난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거든.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쭈욱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
'어떻게 살아야 해요?' 영화의 예고편에서 나는 뜻밖의 질문을 들을 수 있었다.
저도 인생이 엄청 시시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저도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안 끊기고 주욱 이어진다고 생각해요. 행복은 어쩌다 떨어지는 체리 같은 것인데, 우리는 체리가 주는 잠깐의 달콤함을 위해 혓바닥을 내밀고 체리나무 아래에서 종일 기다려야 한다고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해요? 다들 어떻게 살고 있는 거야?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나름의 대답을 갖고 있다. 그러나 답을 말하려 하면 나는 곧 이런 형태의 삶이 과연 실현 가능할까, 하는 회의적인 상태에 놓이고 결국 '이렇게 살면 될 것 같다.'라고 말하는 것을 회피하게 된다. 그러던 중 제인이 말했다.
“아무튼 그래서 다 같이 사는 거야.”
그러니 내가 영화를 예매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 영화는 내 빈곤한 상상력으로 더듬더듬 그려오던 것을 명확하고 세련된 이미지로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네가 원하는 삶은 이런 식으로 가능하다고 나에게 말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예매를 했고 영화를 봤다. 그리고 급속도로 우울해졌다.

소현은 제인에게 말한다. 없는 오른쪽 새끼발가락이 가끔 정말 있기라도 한 것처럼 간지럽다고. 신체의 존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많다. 볼 수 있다면 보는 것이 가장 빠르고 확실하게 여겨질 것이다. 눈으로 보기 전까지 믿지 않겠다는 말도 존재하지 않나. 그러나 세상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떤 신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신체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을까? 통각을 통해 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쩌면 시각보다 더 강력한 증거가 된다. 눈에 보이는 손이나 발도 해당 부위에 통각을 느끼는 순간 보는 것 이상으로 그 존재가 명확하게 와 닿는다. 보이지 않는 기관이나 장기라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위가 먹은 것을 소화시키거나 말거나, 어디에 달려 있거나 말거나 평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으면서 위가 본격적으로 아프기 시작하면 그제야 배를 움켜쥔다. 소현은 간지러움을 느낄 때 발가락이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보거나 만지는 순간 부재를 깨닫는다. 이런 종류의 공허함은 오른쪽 새끼발가락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소현에게 발가락을 만들어주기라도 할 것처럼 그려진다. 정확히는 관객이 그 발가락을 좀 만들어주고 싶도록 만든다. 알을 깨고 나오는 오리나 엉망으로 색종이를 접는 아이를 보고 있는 느낌과 비슷하다. 소현이 그토록 가고 싶었던 뉴월드. 머리 위 빛나는 네온사인을 바라보던 소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조용히 분투한다.
영화에서 허구인지 아닌지 헷갈리지 않는 부분은 마지막 10분 정도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상상인지 나누기 어렵다. 물론 영화를 n차 관람하며 장면을 분해하면 나름대로 구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든다. 하지만 그것을 나누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작업이 아니다. 그게 중요한가? 이 영화에서 무엇이 실제 있었던 일이고 무엇이 소현의 상상인지 나누는 일이 꼭 필요한 작업인가? 대부분의 꿈이 그러하듯 모든 것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현실에서 본 것과 욕망을 재구성하여 꾸는 것이 꿈 아닌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같이 있을 수 있는지.”
제인은 소현에게 ‘안녕. 돌아왔구나.’라고 말한다. 이 말은 꼭 환영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소현이 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처럼 들린다. 제인은 언제나 소현을 어딘가에 속하게 만든다. 소현의 손목에 출입 도장을 찍어주고 번지지 않도록 바람을 불어준 것도 제인이다. 덕분에 소현은 클럽 뉴월드에서 드디어 대화에 참여하게 된다. 소현은 여태 주변인으로서 남의 대화를 보고만 있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으나 제인의 공연을 보는 사람들, 클럽이라는 한 공간에서 분위기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소속되는 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나에게도 꿈이 있어.’라는 문장은 지수를 보여주는 한 문장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지수는 이 영화에서 그나마 미래가 보이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동생과 살기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몰래 아르바이트를 하나 더 하는 지수의 목적은 현실적이고 명확하다. 관객이 그의 미래를 쉽게 그려볼 수 있는 것도 캐릭터 자체가 살고자 하는 욕망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 일어난 비극은 더욱 충격적으로 다가온다. 영화가 비극을 보여주는 방식은 착취적이지 않지만 ‘방에 가두는’ 액션은 지수의 미래를 그 방에 몰아넣고 한 순간에 죽여버리기에 관객에게 묵직한 절망을 준다. 창 밖으로 물건을 던지는 지수는 절망 때문에 자살을 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사실 자살보다는 탈출에 가까운 행동이다. 짐을 챙겨 아래로 던지는 행동은 제가 떨어져 죽어야 할 거리와 고통을 가늠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어디 하나 부러지게 되어도 괜찮으니 이 곳을 나가고야 말겠다는 생에 대한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지수는 생을 위해 목숨을 걸었고 죽었다.
소현의 욕망은 거대하고 뜨겁지만 표면으로 드러나는 일이 거의 없다. 내부에서만 부글거린다. 그 속이 다 타버린 것처럼 느껴져서 유달리 까만 소현의 눈동자를 보고 있으면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은 공포심이 든다. 이 공포는 미지의 것, 잘 알지 못하는 것을 마주했을 때 느껴지는 공포와 어느 정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다. 흡수하기만 하고 아무것도 반사하지 못하는 블랙홀처럼 소현은 모든 상처와 불안, 우울을 잔뜩 머금고 있다. 집어먹기만 하고 아무것도 쏟아내지 못한다. 뱉는 방법을 모른다.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을 체득할 수 없는 삶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상상만으로 살 수 없다. 꿈은 끝나기 마련이다. 소현은 계속해서 ‘같이 사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지만 지수의 죽음이 제인의 죽음으로 이어지며 꿈은 끝난다. 그러나 이것이 ‘같이 살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 영화가 절망을 말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꿈이 끝난 자리에서 삶이 이어진다. 삶은 소현이 마주한 큰 강처럼 흘러가는 것이지 멈추거나 되돌릴 수 없다. 구덩이 안에서 지수의 동생이 묘한 표정으로 건네준 캐러멜을 받아 든 순간 소현은 느꼈을 것이다. 앞으로 이것을 짊어지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같이 살 사람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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